여러 국가, 전국 각지에서 열린 토론대회의 운영자 혹은 심사 위원으로 참여해보면, 토론 입문자, 경험자 상관없이 자주 보이는 습관이 있다. 바로 자신의 노트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 스크립트를 그대로 읽는 것이다. 분명 남들과 같이 많은 조사를 거치고 많은 과정들을 통해 스크립트를 만들었을 것이다. 긴장이 되어서 그럴 수도 있고, 실수를 방지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지만, 스크립트를 앵무새처럼 따라 읽는 것은 여러 면에서 '치명적'이다.
일단 전달력에 문제가 생긴다. 스크립트에 과도하게 의존하면 '소통'보다는 읽기'에 초점이 맞춰져서 준비한 내용을 올바르게 전달하지 못한다. 청중이 발표자의 말을 통해 이해하는 것은 일부일 뿐이다. 청중을,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표정으로, 시선으로, 감정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그들과 계속 소통해야 한다.
토론하다 보면 청중이나 심사위원과 말이 아닌 비언어 요소로 소통할 때가 있다. 대담을 하는 도중에 심사위원의 표정이나 반응을 보고 부가적인 설명이나 예시를 추가하거나 특정 내용을 강조하는 것이 그렇다. 그런데 이러한 소통을 배제한 채 스크립트대로만 읽는 행위는 그들과 소통을 포기하겠다는 의미로 비칠 수 있다.
게다가 원고를 그대로 읽는 것은 토론자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린다. 스크립트를 그대로 읽으면 주제에 대한 이해도가 낮고 자신이 없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또 '주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하는 선입견이 생기기 쉽다. 학교 수업이나 직장에서 원고를 그대로 읽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발표를 들을 때 청중은 자연스럽게 후자를 신뢰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스크립트에 의존하면 화자의 개성을 보여줄 수 없다. '토론' 하면 '논리 대 논리의 매우 엄격한 지적 싸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토론은 이성을 넘어 감성까지 포괄하는 지적 설득 활동이다. 따라서 상대방을 내 편으로 만들거나 내 의견에 동의하게끔 만들기 위해서는 논리뿐만 아니라 모든 요소를 활용해야 한다. 그중 하나가 바로 말하는 사람의 개성이다. 사람마다 성격이 다르듯 말하는 것에도 그 사람의 성격이 묻어 나온다. 고유한 말하기 스타일은 청중에게 화자와 화자가 전달하는 내용이 더 잘 기억되게 만든다. 스크립트대로 읽는 것은 요즘 가정에 하나씩 두고 있는 AI 스피커도 할 수 있다. 그냥 읽는 것이 아닌 감정을 담아 나의 목소리로 '소통'하는 것이 필요한 이유이다.
그렇다면 스크립트 그대로 읽기에서 벗어나 청중과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필자가 추천하는 방법은 '키워드 대담'이다. 키워드 대담이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모두 쓰는 것이 아니라 A4용지에 핵심 키워드 위주로만 정리해 발표하는 것이다. 다음의 예시를 보자.
[예시 1]
(A4 용지)
주제: 기본소득제를 도입할 것이다. (찬성)
요점 1: 기술 발전으로 인한 일자리 감소 문제 되어
설명: 4차 산업혁명 / 인공지능 → 풀타임 일자리 감소 → 정부의 개입 필요
증거: 클라우스 슈바프,
(하략)
[예시 2]
(A4 용지)
주제: 최저임금을 1만 원으로 인상해야 한다. (찬성)
요점 1: 일자리 감소
설명: 최저임금 1만 원 → 매년 두 자릿수 인상 폭 유지 → 인력 감축
증거: 한국경제연구원,
(하략)
이처럼 키워드 중심으로 정리해 대담을 준비하면, 반드시 증명해야 할 내용과 논리의 흐름에 집중할 수 있고, 연단에서 청중과 교감하며 설득할 수 있다. 논제 분석 등 토론 준비를 제대로 했다면 사고 과정과 논리 흐름은 머릿속에 남아 있으므로 자신의 언어로 설득력 있는 대담이 가능하다.
키워드는 일종의 이정표 역할을 하며, 상대방을 설득하는 데 필요한 필수적인 정보나 증거만을 나타낸다. 여기서 키워드의 분량은 실전 연습을 통해 자신에게 가장 편하고 적합한 양을 찾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큰 글씨(폰트 20pt 이상)로 썼다는 가정하에 논거 하나당 A4 용지 1장 이상을 넘어가지 않는 것이 좋다. 대개 처음에는 원고에 있는 문장을 단어나 구로 줄이는 정도에서 그치는데, 이는 키워드 중심의 대담이라고 할 수 없다. 키워드 중심으로 원고를 쓴다는 것은 부차적인 내용은 덜어내고 중요한 내용을 선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 키워드를 적은 원고는 내용을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큰 글씨로 써야 한다. 그래야 텍스트의 홍수에 빠지지 않고 생각이 잘 안 날 때 어떤 내용을 말해야 하는지 빨리 파악할 수 있다. 반면, 빽빽한 글씨로 쓴 원고는 한 번 흐름을 놓치면 어디에서부터 착해야 하는지 신속하게 알아채기 어렵다.
처음 토론을 접하면 누구나 시행착오를 겪는다. 필자 역시 연단에서 패닉 상태에 빠질까 두려워하고 싶은 말을 모두 노트에 적어 완벽하게 발표하려고 애썼다. 그 결과, 오히려 발표할 때마다 노트에 적힌 텍스트에 파묻혀 토론이 더 꼬여만 갔다. 이후 토론은 매우 역동적이고 상호 과정임을 깨닫고 키워드 중심으로 토론을 준비하니 자연스럽게 소통과 설득에 초점을 맞출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여전히 토론할 때나 시각 자료 없이 발표할 때는 이 방법을 사용한다. 절대 빠지면 안 되는 내용을 중심으로 키워드를 뽑아 발표 순서대로 A4용지 1장에 나열한 후 논리를 전개해나간다. 그리고 말하는 중간중간 다음 키워드를 확인하며 나의 언어로 설명하려고 노력한다. 자료는 그다음 문제이다. 여전히 스크립트 없이 발표하기가 두렵다면, 이것만 기억하자. 눈 딱 감고, 말하고 싶은 내용의 3분의 1만 적어 발표해보자. 스크립트가 얼마나 자기 발목을 잡았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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